Japan, 歴史群像シリーズ(역사군상시리즈) 戦国合戦大全 上巻(센고쿠전투대전) 노부나가(信長)「겐키쟁란(元亀争乱)」의 고투

번역(翻訳): 방석구, 진행도: 2/4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信長の「天下布部」宣言に対し、旧権威から猛烈な反発が沸き起った。
「元亀争乱」四年間の危地を、信長は文字通りの「東奔西走」で乗り越え、覇者の座へ大きく前進した。
노부나가(信長)가 「천하포무(天下布部)」선언을 하자, 구시대의 권위를 가진 이들로부터 반발이 맹렬하게 들끓었다.
「겐키 쟁란(元亀争乱)」4년간의 수많은 위기순간을 노부나가(信長)는 문자 그대로 「동분서주(東奔西走)」로 돌파하여, 패자의 자리로 한걸음 크게 도약했다.

信長「元亀争乱」の苦闘
노부나가(信長)「겐키쟁란(元亀争乱)」의 고투

四面楚歌の危機を乗り越えた近江・越前平定戦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위기를 헤쳐나간 오우미(近江) ・ 에치젠(越前) 평전전(平定戦)

文=谷口克弘
글: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克弘)

信長の上洛、 永禄十一年(一五六八)
노부나가(信長)의 상락(上洛), 에이로쿠 11년(永禄 11年, 1568年)

 尾張・美濃・北伊勢、三か国の軍兵が岐阜に集結した。合わせて五、六万もいようか。立政寺には、越前から招いた前将軍の弟足利義昭を保護(ほご)している。信長は立政寺に赴き、義昭にいとまを告げた。岐阜から京都への通路が確保(かくほ)され次第、すぐに迎えをよこすという約束をして。
 오와리(尾張) ・ 미노(美濃) ・ 북이세(北伊勢), 3개국(国)의 군병이 기후(岐阜)에 집결하였다. 합쳐서 5, 6만 정도일까? 류쇼지(立政寺)에서는 에치젠(越前)으로부터 초대한 전 쇼군(将軍)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보호하고 있었다. 노부나가(信長)는 류쇼지(立政寺)로 향한 후, 요시아키(義昭)에게 작별을 고했다. 기후(岐阜)에서 쿄토(京都)로의 통로를 확보한 다음, 곧바로 마중을 보낸다는 약속을 하였다.

 そして信長は、いよいよ西方へ向かっての出陣を命じた。永禄十一年(一五六八)九月七日のことであった。
 그리고 나서, 노부나가(信長)는 마침내 서쪽을 향해 출진 할 것을 명했다. 에이로쿠 11년(永禄 11年, 1568年) 9월 7일의 일이었다.

 翌八日、近江に入り、高宮に陣を布く。ここは近江北半国を支配する浅井長政の分国。長政は妹お市の夫で、信長と同盟を結んでいる。長政は早速高宮を来訪して、義兄に協力を誓った。
 다음 날인 8일, 오우미(近江)로 들어가 타카미야(高宮)에 진을 펼쳤다. 이곳은 오우미(近江)의 북쪽의 반을 지배하는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분국(分国)이었다. 나가마사(長政)는 여동생 오이치(お市)의 남편으로, 노부나가(信長)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나가마사(長政)는 조속히 타카미야(高宮)를 내방하여, 의형(義兄)에게 협력을 서약했다.

 琵琶湖の南岸一帯、すなわち京都に通じる道筋は、六角氏の分国内である。六角氏の当主は義治だが、実権はその父六角承禎(義賢)が握っている。信長は八月、佐和山に逗留しながら、六角氏の説得を試みた。だが、義昭の使者まで遣わしての説得にも、承禎父子は応じなかったのである。信長によって、上洛への道の最初の障害は、六角氏だったのである。
 비와호(琵琶湖) 남해안 일대, 즉, 쿄토(京都)로 통하는 길은 롯카쿠씨(六角氏)의 분국(分国)내였다. 롯카쿠씨(六角氏)의 당주는 요시하루(義治)였지만, 실권은 그 아버지 롯카쿠 죠테이(六角承禎) – 롯카쿠 요시카타(六角義賢) – 가 쥐고 있었다. 노부나가(信長)는 8월, 사와산(佐和山)에 체류하면서, 롯카쿠씨(六角氏) 설득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요시아키(義昭)의 사자까지 보낸 설득에도 불구하고 죠테이(承禎) 부자는 거절을 하였다. 노부나가(信長)의 상락(上洛)의 길에 대한 최초 장애는 롯카쿠씨(六角氏)였던 것이었다.

 十一日、信長は愛知川近辺に野陣を張る。支城の佐和山は目の前、右手奥に承禎父子の居城観音寺、左手奥に箕作城が位置する。承禎もこの三城の守備を固めた。
 11일, 노부나가(信長)는 에치강(愛知川) 부근에 야진(野陣)을 쳤다. 지성(支城)인 사와산(佐和山)은 눈앞에, 우측 안쪽에 죠테이(承禎) 부자의 거성(居城) 칸논지(観音寺)가, 좌측 안쪽에 미츠쿠리성(箕作城)이 위치해 있었다. 죠테이(承禎)도 이 3개 성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十二日の申の刻(午後四時)織田軍の突撃が敢行された。三城中最も遠い箕作城であった。佐久間信盛・木下秀吉・丹羽長秀の部隊が箕作山を一気に攻め立てたのである。一方、柴田勝家・坂井政尚・森可成の隊は観音寺城の押さえ、稲葉・氏家・安藤の美濃三人衆の隊は佐田山の押さえのために動いた。
 12일 신시(申時) – 오후 4시 – 오다군(織田軍)의 돌격이 감행되었다. 3개의 성 가운데 가장 먼 미츠쿠리성(箕作城)이었다.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 키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의 부대가 미츠쿠리산(箕作山)을 단숨에 맹렬히 공격했던 것이었다. 한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 사카이 마사히사(坂井政尚) ・ 모리 요시나리(森可成)의 부대는 칸논지성(観音寺城)을 저지하고, 이나바(稲葉) ・ 우지이에(氏家) ・ 안도(安藤)의 미노 산닌슈(美濃三人衆)의 부대는 사다산(佐田山)을 저지하기 위해서 이동하였다.

주(註): 미노 산닌슈(美濃三人衆)는 이나바 잇데츠(稲葉一鉄) ・ 우지이에 보쿠젠(氏家卜全) ・ 안도 모리나리(安藤守就)입니다.

 箕作城はあっけなかった。夜更け至って信長軍は城内に突入、城を占領した。箕作攻略の報を受けた信長はすぐに移動、箕作山に陣を張った。翌日主城の観音寺を攻撃する手筈を整えたのである。
 미츠쿠리성(箕作城)은 어이없게 낙성되었다. 심야에 이르자 노부나가군(信長軍)은 성내로 돌입하여 성을 점령하였다. 미츠쿠리(箕作) 공략의 보고를 받은 노부나가(信長)는 곧바로 이동, 미츠쿠리산(箕作山)에 진을 펼쳤다. 익일, 주성(主城)인 칸논지(観音寺)를 공격하는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었다.

 ところが、相違して六角氏との戦いはこれで終わってしまった。承禎父子が城を棄てて甲賀郡まで逃げてしまったのである。十三日、信長は観音寺に移る。大勢の六角氏の旧臣がここで信長に降参した。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롯카쿠씨(六角氏)와의 전쟁은 이것으로 끝나버렸다. 죠테이(承禎) 부자가 성을 버리고 코카군(甲賀郡)까지 도망쳐버렸던 것이었다. 13일, 노부나가(信長)는 칸논지(観音寺)로 이동하였다. 여러 롯카쿠씨(六角氏)의 구신(旧臣)이 이곳에서 노부나가(信長)에게 항복하였다.

 なぜ近江半国の戦国大名六角氏は、これほど脆かったのだろうか。それは、家中不統一の一語に尽きる。老臣のうち、後藤・永田・進藤・永原・平井・山岡などことごとく信長に降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京都に居る山科言継が早くも十四日の日記の中で、承禎の没落と一緒にその事実を記しているということは、彼らが早々と六角氏に見切りをつけたことを物語っている。
 왜 오우미(近江)의 반을 소유한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롯카쿠씨(六角氏)는, 이 정도로 약했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가내(家内)를 규합하지 못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가신(家臣) 중에, 고토(後藤) ・ 나가타(永田) ・ 신도(進藤) ・ 나가하라(永原) ・ 히라이(平井) ・ 야마오카(山岡) 등이 모조리 노부나가(信長)에게 항복해 버렸던 것이었다. 쿄토에 있는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가 이미 14일의 일기에서, 죠테이(承禎)의 몰락과 동시에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서둘러 롯카쿠씨(六角氏)를 단념한 것을 증명한다.

 永原重康などは、この年四月より信長に通じていることが文書より知られる。これはおそらく永原に限ったことではなかろう。五年前に当主義治が重臣後藤賢豊を謀殺したことから起こった観音寺騒動によって六角家中は割れた。その後、『六角氏式目』を制定することによって君臣の義務を誓い合ったとはいうものの、もはや主従関係は回復しがたいものになっていた。
 나가하라 시게야스(永原重康) 등은 이해 4월부터 노부나가(信長)에게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 문서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틀림없이 나가하라(永原)에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5년 전, 당주(当主)인 요시하루(義治)가 중신(重臣)인 고토 카타토요(後藤賢豊)를 모살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칸논지 소동(観音寺騒動)에 의해서 롯카쿠(六角)의 가내(家内)는 분열되었다. 그 후, 『롯카쿠 시키모쿠(六角式目』를 제정하는 것으로 군신(君臣)의 의무를 서로 맹세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주종관계는 회복하기 어렵게 되어있었다.

 観音寺騒動の時、調停役を務めて以後発言力を増し、六角家中随一の重臣となっていた蒲生賢秀も、承禎の没落後、信長に降った。
 칸논지 소동(観音寺騒動) 때, 중재역을 맡아서 이후 발언력을 높이고, 롯카쿠가(六角家) 중 제일의 중신(重臣)이 되어있던 가모 카타히데(蒲生賢秀)도, 죠테이(承禎)의 몰락 후, 노부나가(信長)에게 항복했다.

第一次越前攻め、元亀元年(一五七〇)
제1차 에치젠 공격, 겐키 원년(元亀 元年, 1570年)

 元亀元年(一五七〇)四月二十日、信長は京都を出陣、近江坂本を経由してその日は和邇に着陣した。率いる兵は三万を数えたという。当時の戦国大名の中、これほどの兵力を動員できる者は少ない。
 겐키 원년(元亀 元年, 1570年) 4월 24일, 노부나가(信長)는 쿄토(京都)를 출진, 오우미(近江)의 사카모토(坂本)를 경유해서 그 날 와니(和邇)의 진지에 도착했다. 이끄는 병력은 3만을 헤아렸다고 한다. 당시의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가운데, 이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는 적었다.

 信長の行程は、その後、二十一日近江田中、二十二日若狭熊川、二十三日佐柿と移る。京都の人タは、この時の信長の目標がよくわからなかったらしい。盟友である浅井氏の分国を通らず、琵琶湖の西岸を通って北上したから、若狭の平定のための出陣と思っていた者が多かったようである。
 노부나가(信長)의 행보는, 그 후, 21일 오우미(近江)의 타나카(田中), 22일 와카사쿠마강(若狭熊川), 23일 사가키(佐柿)로 이동. 쿄토(京都) 사람들은, 이때 노부나가(信長)의 목표를 잘 몰랐을 것이다. 맹우인 아사이씨(浅井氏)의 분국(分国)을 지나지 않고, 비와호(琵琶湖)의 서해안을 지나서 북상했기 때문에, 와카사(若狭) 평정(平定)을 위한 출진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たしかに若狭の国衆のほとんどが信長に従う中で、武藤友益のように反抗的な者もいた。だが、信長の真の目標は、そんな小さなものではなかった。
 확실히, 와카사(若狭)의 쿠니슈(国衆) 대부분이 노부나가(信長)를 따르는 가운데, 무토 토모마스(武藤友益) 같은 반항적인 자도 있었다. 하지만, 노부나가(信長)의 실제 목표는 그와 같이 작은 것이 아니었다.

 それは越前の守護朝倉氏。将軍義昭の名で催促(さいさく)しても一向に上洛しようとせず、近国戦国大名の中で最も大きな勢力を保っている朝倉氏を討つことが、この遠征の本当の目的だったのである。
 목표는 에치젠(越前)의 슈고(守護) 아사쿠라씨(朝倉氏). 쇼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이름으로 상락(上洛)을 재촉해도 전혀 응하지 않고, 주변의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아사쿠라씨(朝倉氏)를 토벌하는 것이, 이 원정(遠征)의 진정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二十五日、信長は逗留(とうりゅう)していた佐柿を出陣した。そして越前敦賀郡に乱入、すぐに手筒山城に襲い掛かった。手筒山城は、標高一七一メートルの山に築かれた山城である。寺田采女正が守備していた。
 25일, 노부나가(信長)는 체류하고 있던 사가키(佐柿)를 출진하였다. 그리고, 에치젠(越前)의 츠루가군(敦賀郡)에 난입, 곧바로 테즈츠산성(手筒山城)을 습격했다. 테즈츠산성(手筒山城)은 해발 171m의 산 위에 세워진 산성(山城)이었다. 테라다 우네메노쇼(寺田采女正)가 수비하고 있었다.

 決して攻めるに易い城ではない。だが、信長は力攻めを命じた。緒戦は圧倒的な力を見せつけるのも、戦のセオリーである。
 결코 공격하기에 쉬운 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부나가(信長)는 역공을 명했다. 서전(緒戦)에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은 전쟁의 이론이기도 하다.

 信長軍の猛攻は、この要害を一日で落とした。討ち取った首数一三七〇というが、味方の犠牲もかなりの数に上ったようである。重臣森可成の長男で、長可や蘭丸の兄にあたる伝兵衛森可隆はここで戦死している。
 노부나가군(信長軍)의 맹공은 이 요해(要害)를 하루 만에 떨어뜨렸다. 떨어뜨린 적군의 머릿수가 1,370이라지만, 아군의 피해도 상당한 수에 이르렀던 것 같다. 중신(重臣) 모리 요시나리(森可成)의 장남으로, 나가요시(長可)나 란마루(蘭丸)의 형이 되는 덴베에(伝兵衛) 요시타카(可隆)도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続く目標は、この北西に位置する金ヶ崎城である。敦賀郡の主城であるこの城には、義景の従兄弟にあたる朝倉景恒が守備を固めていた。信長は翌二十六日、たちまちここをも攻略して景恒を逐った。北近江と越前とを結ぶ要衝の地にある疋田城も、信長軍の勢いに押されて自壊してしまった。こうして敦賀郡全城がわずか数日間で信長の掌中に収まったのである。
 다음목표는 북서방향에 위치한 카네가사키성(金ヶ崎城)이었다. 츠루가군(敦賀郡)의 주성(主城)으로 요시카게(義景)의 종형제가 되는 아사쿠라 카게츠네(朝倉景恒)가 수비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노부나가(信長)는 다음날인 26일, 이곳을 급습하여 카게츠네(景恒)를 추방하였다. 북오우미(北近江)와 에치젠(越前)을 잇는 요충지인 히키다성(疋田城)도, 노부나가군(信長軍)의 세력에 압도되어 자멸해버렸다. 이렇게 하여 츠루가군(敦賀郡)의 전성이 불과 수일 만에 노부나가(信長)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いよいよ木芽峠を越して、朝倉氏の本拠に軍を勧めるのみ。信長があらためて決意を固めた時、驚くべき一報が入った。
 마침내 키노메고개(木芽峠)를 넘어, 아사쿠라씨(朝倉氏)의 본거지에 군을 진입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노부나가(信長)가 새삼 결의를 다질 때, 경악할만한 보고가 들어왔다. 아사이씨(浅井氏)의 배반이었다.

つづく….

용어 설명
– 사와산(佐和山) さわやま
 시카켄(滋賀県) 히코네시(彦根市)에 있는 산. 해발 233m.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거성(居城)이었다.

– 에치강(愛知川) えちがわ
 시카켄(滋賀県) 중동부를 북서로 감아 돌아 비와호(琵琶湖)로 흘러 드는 강.

– 칸논지성(観音寺城) かんのんじじょう
 시카켄(滋賀県) 가모군(蒲生郡) 아즈치마치(安土町)의 키누가사산(繖山) – 칸논지산(観音寺山) – 에 있던 성(城). 난보쿠쵸(南北朝) 무렵부터 오우미(近江)의 반을 수호, 사사키 롯카쿠씨(佐々木六角氏)의 본성(本城)이 되어, 에이로쿠 11년(永禄 11年, 1568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공격을 받아 폐성이 되었다. 석벽(石垣)을 쌓은 산성으로서는 일본(日本) 제일의 규모.

원문 출처
역사군상시리즈(歴史群像シリーズ) 센고쿠전투대전(戦国合戦大全) 상권(上巻)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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