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吉田稔麿(요시다 토시마로)

번역(翻訳): 방석구, 총 진행도 56/56

吉田稔麿(よしだ としまろ)
요시다 토시마로(吉田稔麿)

天保12年(1841)~ 元治元年(1864) 享年24歳
텐포 12년(天保 12年, 1841年) ~ 겐지 원년(元治 元年, 1864年). 향년 24세.

 長州藩の足軽の子。低い身分のため姓を名乗れず、”吉田”は自称だった。開明的に見える長州でも身分差別は厳しく、安政の大地震の処理で活躍するまでは無名だった。
 쵸슈한(長州藩) 아시가루(足軽)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낮은 신분 때문에 성을 요시다(吉田)라고 바꾸고 자칭했다. 개명적(開明的)으로 보이는 쵸슈한(長州藩)에서 조차 신분 차별이 엄격하여,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의 문제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무명이었다.

 もともと学問が好きで、吉田松陰の門弟となったことが稔麿の一生を決定づけた。第2期松下村塾創設メンバーの一人となり、後から弟子になった伊藤博文(俊輔)や山県有朋などとは、その意味で若干立場が異なる。松陰も勤勉な稔麿を愛し、自ら秀実という名と無逸の号を与えた。「学問を続ければやがて実を結び、何事も逸することはない」。そんな意味がこめられた贈り物に稔麿は一層励み、松陰門下の三秀の一人に数え上げられた。
 본디 학문을 좋아하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제자가 된 것이 토시마로(稔麿)의 일생을 결정 지었다. 제2기 쇼카손쥬쿠(松下村塾) 창설 맴버의 일인이었기 때문에, 뒤이어 제자가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 등과는 그 의미에서 다소 입장이 달랐다. 쇼인(松陰)도 근면(勤勉)한 토시마로(稔麿)를 사랑해, 스스로 히데미(秀実)라는 이름과 無逸의 호(号)를 주었다. 「학문을 계속하면 머지않아 열매를 맺고, 어떤 일도 놓치는 법이 없다」. 이런 의미가 담긴 선물에 토시마로(稔麿)는 더욱 자극 받아, 쇼인(松陰) 문하 산슈(三秀) –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요시다 토시마로(吉田稔麿) – 의 일인에 열거되었다.

 しかし稔麿には、ぬぐい難い引け目があった。足軽という身分だけは、どんなに学問ができようと決して覆らない。松陰が上士である高杉晋作をかわいがり、桂小五郎には同志のように接するのを見て、稔麿は悩んだ。それは嫉妬の一種でもあったろう。足軽よりも身分の低かった伊藤と山県が、図々しいまでに平然と塾に通ったのとは、非常に対照的といえる。その意味では、生来、稔麿には性格的な暗さがあった。
 그러나 토시마로(稔麿)에게는 씻기 어려운 열등감이 있었다. 아시가루(足軽)라는 신분은 어떻게 학문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뒤집을 수는 없었다. 쇼인(松陰)이 죠시(上士)인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를 귀엽게 여기고,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에게는 동지(同志)처럼 대하는 것을 보고 토시마로(稔麿)는 번민했다. 이것을 질투(嫉妬)의 일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시가루(足軽)보다도 신분이 낮았던 이토(伊藤)나 야마가타(山県)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사숙을 다닌 것과 비교해 대단히 대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선천적으로 토시마로(稔麿)에게는 성격적인 어두움이 있었다.

 池田屋の変で稔麿が死ぬのも、身分に固執しすぎたためかもしれない。危地を脱出して藩邸に事件を報告するや、稔麿は槍をとって再び現場へ戻っている。「武士が、仲間を見殺しにして逃げ延びられようか」…そんな考えが、稔麿の脳裏をよぎったのだろう。
 이케다야 사건(池田屋事件)에서 토시마로(稔麿)가 죽은 것도, 신분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위지(危地)를 탈출하여 한테이(藩邸)에 사건을 보고하자마자, 토시마로(稔麿)는 창을 잡고 재차 현장으로 돌아갔다. 「부시(武士)가 동료의 죽음을 못 본체하고 달아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 토시마로(稔麿)의 뇌리(脳裏)를 스쳤을 것이다.

 ’05년 2월 12일, 이이 나오스케를 시작으로 하여, ’08년 7월 7일, 요시다 토시마로(吉田稔麿)를 마지막으로 일본 바쿠마츠(幕末) 56인의 모든 오역을 마칩니다. 그간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おしまい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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