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吉田東洋(요시다 토요)

번역(翻訳): 방석구, 총 진행도 55/56

吉田東洋(よしだ とうよう)
요시다 토요(吉田東洋)

文化13年(1816) ~ 文久2年(1862). 享年47歳.
분카 13년(文化 13年, 1816年) ~ 분큐 2년(文久 2年, 1862年). 향년 47세.

 土佐藩の参政。幕末の賢侯の一人だった土佐藩主、山内容堂にその才能を愛され、大抜擢の末、藩政を一手に握った切れ者。また自身が開いた私塾で、義理の甥にあたる後藤象二郎や福岡孝悌、板垣退助らに学問・思想的な影響を与えた。彼らを一派として活躍の場を与えつつ、富国強兵策に基づいて土佐藩の実力を大いに高めた。
 토사한(土佐藩) 산세이(参政). 바쿠마츠시대(幕末時代)의 현후(賢侯) 중 한 명인 토사(土佐) 한슈(藩主) 야마노우치 요도(山内容堂)에 그 재능을 인정받아 크게 발탁된 이래, 한세이(藩政)를 한 손에 움켜쥐었던 세력가. 또한 자신이 열었던 사숙(私塾)에서 조카에 해당하는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나 후쿠오카 타카치카(福岡孝悌),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 등에게 학문과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그들을 일파로 하여 부국강병책(富国強兵策)을 근간으로 토사한(土佐藩)의 실력을 드높였다.

 剛毅果断な性格で、これに才能・役職共に家中筆頭の実力者だという自信が加わり、傲慢尊大な態度が目立ったという。若い頃、藩主の親戚と宴席で口論となり、ゲンコツで殴ったという武勇伝からもそれがうかがえる。また土佐特有の苛酷な身分制度にあぐらをかき、郷士には人とも思わぬ接し方だった。
 강직 과단(果断)한 성격으로, 거기에 재능과 직무가 가중(家中) 필두의 실력자였다는 자신감이 더해져, 오만한 태도가 두드러졌다고 한다. 젊은 시절, 한슈(藩主)의 친척과 연회석에서 언쟁이 벌어지자, 상대를 주먹으로 때렸다고 하는 무용전(武勇伝)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엿보인다. 또한 토사(土佐) 특유의 가혹한 신분제도에 안주해 고시(郷士)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藩主の容堂が幕府に同情的な考えを持っていたため、その片腕の東洋も自然、幕府と朝廷のバランスを保つという公武合体説を唱えていた。これに対し、藩の下級階層の指導者だった武市瑞山(半平太)は熱烈な尊王主義者で、思想的な対立を生んだ。武市を郷士(実際には白札という上士扱いの身分)と侮り、ごくたまに面会を許してもその説を書生論と蔑んだ。そのため、ついに武市が主宰した土佐勤皇党の党員に暗殺される。時に容堂ですら手を妬いた傲岸不遜の気質が、藩内に多くの敵を作った結果である。
 한슈(藩主)인 요도(容堂)가 바쿠후(幕府)에 동정적인 태도를 가졌기에, 그 한쪽 팔이었던 토요(東洋)도 자연, 바쿠후(幕府)와 조정(朝廷)의 균형이 유지되는 고부갓타이(公武合体)를 주창했다. 이에 반해, 한(藩)의 하급계층 지도자였던 타케치 즈이잔(武市瑞山) –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 – 은 열혈 손노주의자(尊王主義者)였기에 둘 사이에 사상적 대립을 낳았다. 타케치(武市)와 고시(郷士) – 실제로는 시로후다(白札)라는 죠시(上士) 대우의 신분이었다 – 를 경멸해, 매우 드물게 면회를 허락했다고 해도 그 이야기를 탁상공론으로 치부했다. 그 때문에, 결국 타케치(武市)가 주재한 토사 킨노당(土佐勤皇党) 당원에게 암살당했다. 때때로 요도(容堂)조차 손 쓸 수 없던 오만불손(傲岸不遜)한 기질이, 한내(藩内)에 다수의 적을 만든 결과였던 것이다.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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