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大村益次郎(오무라 마스지로)

번역(翻訳): 방석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

大村益次郎(おおむら ますじろう)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

文政7年, 1824 ~ 明治2年, 1869. 享年46歳.
분세이 7년(文政 7年) ~ 메이지(明治 2年). 향년 46세.

 長州藩領の農民医者。前名は村田蔵六。桂小五郎の後押しで長州藩軍の参謀に。
 쵸슈(長州) 한료(藩領)의 농민 의사(医者). 이전 이름은 무라타 죠로쿠(村田蔵六)라 했다.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의 후원으로 쵸슈한(長州藩)의 참모(参謀)가 되었다.

 広瀬淡窓、梅田幽斎、奥山静叔に学んで儒学、蘭学、医学の力をつけた。大村が本格的に勉学を始めたのは20歳からだが、その遅いスタートにも関わらず、緒方洪庵の適塾に入門すると並み居る秀才を押し退け、一年を待たずして塾頭に推し上げられた。適塾ではもっぱら西洋の兵学を学び、その学識はおそらく東洋一だったろう。
 히로세 탄소(広瀬淡窓), 우메다 유사이(梅田幽斎), 오쿠야마(奥山) 가르침을 받아 유학(儒学), 란가쿠(蘭学), 의학(医学)의 실력을 길렀다. 오무라(大村)가 본격적으로 면학(勉学)을 시작했던 것은 20살부터이지만, 그 늦은 스타트(Start)에도 관계없이, 오가타 코안(緒方洪庵)의 테키쥬쿠(適塾)에 입문하자 열석한 수재를 제치고, 일년이 채 못되어 쥬쿠토(塾頭)가 되었다. 테키쥬쿠(適塾)에서는 오로지 서양(西洋)의 군사학(兵学)을 익혔기 때문에, 그 학식에서는 틀림없이 동양(東洋) 제일이었을 것이다.

 ぶっきらぼうな性格で、道ですれ違った隣人に「お暑うございますな」と声をかけられると、「夏が暑いのは当然です」と答えたという。別に相手を嫌っているわけでも無視したわけでもなく、大村としては自然界の摂理に即した返事をした、というだけのことで、つまり本人には協調性に欠けるという自覚がまったくなかった。
 무뚝뚝한 성격으로, 길에서 마주친 이웃사람에게 「더운 날씨네요?」라는 말을 건네 받으면, 「여름이 더운 것은 당연합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별로 상대를 싫어하고 있는 것도 무시했던 것도 아니고, 오무라(大村)로서는 자연계(自然界)의 섭리에 맞는 대답을 했다고 말할 정도의 것으로, 요컨대 본인에게는 협조성(協調性)이 부족하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あわせて根っからの合理主義者の上、無口だったため、周囲の人間と余計な摩擦を生んだ。暗殺という悲惨な最期を迎えるが、それを指図したのは大村とたびたび衝突し、その才能を激しく妬んだ元同僚の海江田信義だったという。
 아울러 본디부터 합리주의자인 이상, 과묵했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과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어냈다. 암살(暗殺)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그것을 지시한 것은 오무라(大村)와 번번이 충돌하고, 그 재능을 심하게 시기한 동료 가이에다 노부요시(海江田信義)였다고 한다.

 第2次長州征伐では、40倍近い戦力差を覆して勝利を生む。戦略・戦術立案だけでなく、明治新政府では兵制をまとめ上げて陸軍の基礎を作った。また将来の西南戦争を予期し、「大坂に兵器工場を造り、大砲と弾薬を大量に準備して薩摩に備えよ」と語っていたという。これも予言という非現実的なものではなく、明晰かつ合理的な大村の頭脳が立てた計算式から、ごく当然のように導き出された答えだった。
 제2차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에서는 40배 가까운 전력차를 극복하고 승리를 만들어냈다. 전략(戦略) ・ 전술(戦術)의 입안(立案)뿐만이 아니라, 메이지 신정부(明治新政府)에서는 병제를 정리해 육군(陸軍)의 기초를 만들었다. 또한 장래의 세이난전쟁(西南戦争)을 예기하고, 「오사카(大坂)에 병기공장(兵器工場)을 만들어, 대포(大砲)와 탄약(弾薬)을 대량으로 준비하고 사츠마(薩摩)에 대비하라」고 말했다 한다. 이것은 예언이라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고, 명석하고도 합리적인 오무라(大村)의 두뇌가 세운 계산식으로부터 지극히 당연하게 도출된 답이었다.

용어 설명
– 쵸슈(長州) ちょうしゅう
나가토노쿠니(長門国)의 다른 이름. 나가토(長門).

– 란가쿠(蘭学) らんがく
에도(江戸) 중기 이후, 홀란드어(Olanda語) – 네덜란드 – 를 통해 서양의 학술 ・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의 총칭.

– 테키쥬쿠(適塾) てきじゅく
텐포 9년(天保 9年, 1838年), 오가타 코안(緒方洪庵)이 오사카(大坂)에 열었던 란가쿠(蘭学) 사숙.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 ・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 하시모토 사나이(橋本佐内) 등 바쿠마츠(幕末)부터 메이지(明治)에 걸쳐서 활약했던 인재를 배출(輩出)했다. 오가타쥬쿠(緒方塾). 테키테키사이쥬쿠(滴々斎塾).

–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ちょうしゅう-せいばつ
바쿠마츠(幕末)기,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의 쵸슈한(長州藩) 토벌전쟁. 겐지 원년(元治 元年, 1864年) 7월,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에서 황거(皇居)로 발포한 것을 이유로 바쿠후(幕府)는 출병. 시코쿠(四国) 함대(艦隊) 시모노세키(下関) 포격(砲撃)사건(事件) – 시코쿠 연합함대 시모노세키 포격사건(四国連合艦隊下関砲撃事件) – 에 의해 보수파(保守派)로 실권이 바뀌고 있던 쵸슈한(長州藩)은, 항전하지 않고 바쿠후(幕府)에 항복 – 제1차(第一次)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그 후, 쵸슈한(長州藩)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등의 토바쿠파(討幕派)가 반란에 의해 실권을 장악, 바쿠후(幕府)에 대립. 바쿠후(幕府)는 케이오 2년(慶応 2年, 1866年) 6월 재차 정벌을 시작하지만, 제한(諸藩)의 반대 등으로 사기가 오르지 않고, 거한(挙藩) 체제인 쵸슈군(長州軍)에 각지에서 패해, 재 정벌은 실패, 바쿠후(幕府)의 권위(権威)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 제2차(第二次)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사진 출처
근대 일본인의 초상(近代日本人の肖像)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