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 용어 설명으로 본 바쿠마츠(幕末) ・ 메이지(明治) 연표(年表)

바쿠마츠(幕末) ・ 메이지(明治) 연표(年表)

 

년 (年) 정세(情勢)
카에이 6년(嘉永 6年, 1853年) 쿠로후네(黒船) 내항
 카에이 6년(嘉永 6年, 1853年), 미국(米国) 동인도 함대 사령장관(東インド艦隊司令長官) 페리(Matthew Calbraith P.)가 우라가(浦賀)에 내항.
카에이 7년(嘉永 7年, 1854年) 일미 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
 카에이 7년(嘉永 7年, 1854年)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가 페리(Matthew Calbraith P.)와 맺은 조약. 시모다(下田) ・ 하코다테(箱館) 양항(港)에 대해 아메리카 선박의 기항(寄港), 장작과 물 ・ 식료품 등의 보급, 시모다(下田)에 영사(領事)를 두는 것 등을 허가했다. 무역(貿易)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개국의 단서가 된다. 카나가와조약(神奈川条約).
안세이 4년(安政 4年, 1857年) 시모다 조약(下田条約)
 안세이 4년(安政 4年, 1857年), 미국(米国) 총영사(総領事) 하리스(Townsend Harris)와 시모다부교(下田奉行) 사이에 조인(調印)된 조약(条約). 나가사키(長崎) 개항(開港) ・ 영사재판권(領事裁判権) 등을 규정했다. 일미 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의 보충과 함께 일미 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의 시발점이 되었다. 시모다협약(下田協約). 일미약정(日米約定).
안세이 5년(安政 5年, 1858年) 일미 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 にちべい-しゅうこうつうしょうじょうやく
 안세이 5년(安政 5年, 1858年),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가 아메리카(America) 주일총영사(駐日総領事) 하리스(Townsend Harris)와 맺은, 무역(貿易)의 자유를 인정한 최초의 조약(条約). 시모다(下田) ・ 하코다테(箱館) 외에 카나가와(神奈川) ・ 나가사키(長崎) ・ 니이가타(新潟) ・ 효고(兵庫)의 개항(開港), 외국인 거주지의 설정 등을 결정했지만, 영사재판권(領事裁判権)을 규정하고, 관세자주권(関税自主権)을 부정하는 불평등 조항을 끼워넣었다.

안세이 5개국조약(安政の五か国条約)
 안세이 5년(安政 5年, 1858年),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미(米) ・ 란(蘭) – 네덜란드 – ・ 로(露) – 러시아 – ・ 영(英) ・ 불(仏) 5개국과 차례로 체결(締結)한 통상조약(通商条約)의 총칭. 하코다테(箱館) ・ 효고(兵庫) ・ 카나가와(神奈川) ・ 나가사키(長崎) ・ 니이가타(新潟) 5개 항(港)의 개항(開港)을 약정했다. 칙허(勅許)를 앙청하지 않고 조인한 것으로 안세이의 가조약(安政の仮条約)이라고 불리고, 손노죠이(尊王攘夷) 운동의 격화를 초래한다. 또한, 치외법권(治外法権)이나 관세 자주권(関税自主権)의 측면에서 장래에 화근을 남기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
 안세이 5년(安政 5年, 1858年)부터 다음해에 걸쳐, 안세이 5개국조약(安政の五か国条約) 조인과 쇼군(将軍)의 후계자 문제에 관해서 격화된 손노죠이(尊王攘夷) 운동파(運動派)에 대해,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행한 탄압(弾圧). 연좌(連座)자는 쿠교(公卿) ・ 지사(志士) 백 여명.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内)등 8명이 처형당했다.

안세이 6년(安政 6年, 1859年)
안세이 7년(安政 7年, 1860年) 사쿠라다몬가이의 변(桜田門外の変)
 안세이 7년(安政 7年, 1860年) 3월 3일,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사쿠라다문(桜田門)밖에서 미토(水戸) 로시(浪士)등 18명에 의해서 암살(暗殺)당한 사건(事件). 칙허(勅許)를 기다리지 않고 일미 수호통상조약 (日米修好通商条約)에 조인(調印)한일 등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에 의한 탄압(弾圧)등에 대해, 미토(水戸) 로시(浪士)들이 격분해서 일으켰다.
분큐 1년(文久 1年, 1861年)
분큐 2년(文久 2年, 1862年) 사카시타몬의 변(坂下門外の変)
 분큐 2년(文久 2年, 1862年) 1월 15일, 미토(水戸) 로시(浪士)를 중심으로한 죠이파(尊攘派)가 에도성(江戸城) 사카시타몬(坂下門) 밖에서, 로쥬(老中)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를 습격해 부상을 입힌 사건. 노부마사(信正)가 고부갓타이론(公武合体論)을 주창해, 카즈노미야(和宮) 코우카(降嫁)를 실현한 것에 분격한 것.

테라다야 소동(寺田屋騒動)
 분큐 2년(文久 2年, 1862年), 쿄토(京都) 후시미(伏見)에 있는 후나야도(船宿) 테라다야(寺田屋)에서, 사츠마한(薩摩藩)의 손죠파(尊攘派), 아리마 신시치(有馬新七)등이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명령을 받았던 같은 한(藩) 소속의 한시(藩士)에게 암살(殺害)당했던 사건(事件). 손죠파(尊攘派)와 고부갓타이파(公武合体派)의 대립에 의한다.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
 분큐 2년(文久 2年, 1862年) 8월, 나마무기촌(生麦村)에서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행렬을 흩뜨린 영국(Inglez) – 포루투칼어 – 인을 사츠마(薩摩) 한시(藩士)가 살해한 사건. 영국(Inglez)은 바쿠후(幕府)와 사츠마한(薩摩藩)에 범인(犯人)인도와 배상금을 요구해, 바쿠후(幕府)는 배상금을 지불했으나 사츠마한(薩摩藩)은 이를 거부해, 사츠에이센소우(薩英戦争)의 원인이 되었다.

분큐 3년(文久 3年, 1863年) 사츠에이센소우(薩英戦争)
 분큐 3년(文久 3年, 1863年) 7월,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의 보복을 위해 카고시마만(鹿児島湾)에 내습한 영국(Inglez) – 포루투칼어 – 동양함대(東洋艦隊)와 사츠마한(薩摩藩)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 쌍방모두 손실이 커, 동년 11월 요코하마(横浜)에서 화친이 성립되었다. 이후 사츠에이(薩英)는 긴밀도를 높였다.

7경 실각(七卿落ち) しちきょうおち
 분큐 3년(文久 3年, 1863年) 8월 18일의 정변(政変)으로 고부갓타이파(公武合体派)에 패해 실각한 손죠(尊攘) 급진파(急進派) 쿠교(公卿) 산죠 사네토미(三条実美) ・ 산죠 스에토모(三条西季知) ・ 시죠 타카우타(四条隆謌) ・ 히가시쿠제 미치토미(東久世道禧) ・ 미부 모토나가(壬生基修) ・ 니시키코지 요리노리(錦小路頼徳) ・ 사와 노부요시(沢宣嘉)가 쿄토(京都)를 탈출해서 쵸슈한(長州藩)으로 도주한 사건. 다음해 재기를 도모해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을 일으킨다.

겐지 원년(元治 元年, 1864年) 이케다야 사건(池田屋事件)
 겐지 원년(元治 元年, 1864年) 6월 5일 밤, 쿄토(京都)의 이케다야(池田屋)에서 손노죠이(尊王攘夷) 지사(志士)들이 쿄토(京都)에 방화 후 혼란을 틈타 텐노(天皇)를 쵸슈한(長州藩)으로 옹립하려는 회합(會合)을 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신센구미(新撰組)가 이케다야(池田屋)을 급습, 손노죠이(尊王攘夷) 지사(志士)들을 참살한 사건(事件).

킨몬의 변(禁門の変)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
 겐지 원년(元治 元年, 1864年) 7월, 전년 8월 18일의 정변에서 쿄토(京都)를 쫓겼던 쵸슈한(長州藩)이 형세만회를 위하여 쿄토(京都)에 군사를 전진시켜, 아이즈(会津) ・ 사츠마한(薩摩藩) 등의 군사와 하마구리고몬(蛤御門) 근처에서 교전(交戦)하고 패했던 사건(事件).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바쿠마츠(幕末)기,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의 쵸슈한(長州藩) 토벌전쟁. 겐지 원년(元治 元年, 1864年) 7월,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에서 황거(皇居)로 발포한 것을 이유로 바쿠후(幕府)는 출병. 시코쿠(四国) 함대(艦隊) 시모노세키(下関) 포격(砲撃)사건(事件) – 시코쿠 연합함대 시모노세키 포격사건(四国連合艦隊下関砲撃事件) – 에 의해 보수파(保守派)로 실권이 바뀌고 있던 쵸슈한(長州藩)은, 항전하지 않고 바쿠후(幕府)에 항복 – 제1차(第一次)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그 후, 쵸슈한(長州藩)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등의 토바쿠파(討幕派)가 반란에 의해 실권을 장악, 바쿠후(幕府)에 대립. 바쿠후(幕府)는 케이오 2년(慶応 2年, 1866年) 6월 재차 정벌을 시작하지만, 제한(諸藩)의 반대 등으로 사기가 오르지 않고, 거한(挙藩) 체제인 쵸슈군(長州軍)에 각지에서 패해, 재 정벌은 실패, 바쿠후(幕府)의 권위(権威)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 제2차(第二次)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시코쿠 연합함대 시모노세키 포격사건(四国連合艦隊下関砲撃事件)
 겐지 원년(元治 元年, 1864年) 8월, 영(英) ・ 불(仏) ・ 미(米) ・ 란(蘭) – 네덜란드 – 4개국 연합함대(連合艦隊)가 시모노세키(下関)를 공격한 사건(事件). 전년 5월 쵸슈한(長州藩)의 외국선(外国船) 포격에 대한 보복으로 행해졌다. 시모노세키 사건(下関事件). 바칸센소우(馬関戦争).

겐지 2년(元治 2年, 1865年)
케이오 원년(慶応 元年, 1865年)
케이오 2년(慶応 2年, 1866年) 삿쵸 연합(薩長連合)
 케이오 2년(慶応 2年, 1866年) 제2차(第二次)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을 앞두고 삿쵸(薩長) 양한(両藩)이 결성한 공수동맹(攻守同盟).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등의 주선으로 쵸슈(長州)의 키도 타카요시(木戸孝允) –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의 개명 후 이름 – 와 사츠마(薩摩)의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등에 의해서 성립.

제2차(第二次)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를 참고.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7年) 센츄핫사쿠(船中八策)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7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상경(上京)중에 선내(船中)에서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에 제시한, 8가지 조목으로 이루어진 신 국가구상.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 ・ 의회설치 ・ 대전제정(大典制定) ・ 해군확장 ・ 제 외국과의 국교수립(国交樹立) 등.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은 토사한(土佐藩)의 상신에 의해 실현, 나머지는 5개 조의 서약문과 신정부에 계승된다.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7年) 11월 9일 도쿠가와(徳川) 15대 쇼군(将軍) 요시노부(慶喜)가 세이이 타이쇼군(征夷大将軍)의 직(職)을 그만두고, 정권을 조정(朝廷)에 반상(返上)하는 것을 제의, 이튿날 조정(朝廷)이 그것을 허가한 일. 고부갓타이파(公武合体派)의 전 토사(土佐) 한슈(藩主) 야마노치 토요시게(山内豊信)의 상신에 의하지만, 토바쿠(討幕)의 명분을 상실한 것으로 보았던 토바쿠파(討幕派)는 동일 토바쿠(討幕)의 밀칙(密勅)을 얻어, 쿠데타(Coup d’état)에 의한 요시노부(慶喜)의 사관납지(辞官納地)를 결정하고,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를 거쳐 보신센소우(戊辰戦争)로 발전시켰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암살(暗殺)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8年) 왕정복고(王政復古)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8年) 12월 9일, 토바쿠파(討幕派)가 왕정복고(王政復古) 대호령(大号令)을 발표해, 에도 바쿠후(江戸幕府)를 폐하고 정권(政権)을 조정(朝廷)으로 옮긴 정변(政変).

코고쇼 회의(小御所会議)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8年) 12월 9일 – 연호일자임 -, 왕정복고(王政復古) 대호령(大号令)을 발표한 밤, 쿄토(京都) 고쇼(御所)내 코고쇼(小御所)에서 개최된 어전회의(御前会議). 토바쿠파(討幕派)가 고부갓타이론(公武合体論)을 누르고, 도쿠가와씨(徳川氏)의 사관납지(辞官納地)를 결정했다.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메이지 1년(明治 1年, 1868年)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1월 3일에 일어난 큐바쿠후군(旧幕府軍) 및 아이즈(会津) ・ 쿠와나한(桑名藩) 병사와, 삿쵸군(薩長軍)과의 내전(内戦). 신정부(新政府)가 왕정복고(王政復古) 대호령(大号令)에 잇따라 코고쇼 회의(小御所会議)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사관납지(辞官納地)를 결정한 것에 대해, 큐바쿠후(旧幕府)측이 거병(挙兵), 토바(鳥羽) ・ 후시미(伏見)에서 삿쵸군(薩長軍)과 교전(交戦). 보신센소우(戊辰戦争)의 발단이 되었지만, 큐바쿠후군(旧幕府軍)의 대패로 종료되어, 토바쿠파(討幕派)의 우세가 확립되었다.

보신센소우(戊辰戦争)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보신(戊辰)의 해에 시작되어, 유신정부군(維新政府軍)과 큐바쿠후(旧幕府)측간의 사이에서 16개월간에 걸쳐서 싸웠던 내전(内戦). 정월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에서 승리했던 정부군(政府軍)은, 4월 에도죠(江戸城)를 접수, 우에노(上野)에 틀어박힌 쇼기타이(彰義隊)는 간토(関東) 각지에서 큐바쿠후(旧幕府) 주전파(主戦派)를 토벌하고, 오우에츠렛판동맹(奥羽越列藩同盟)를 맺어서 대항하는 제한(諸藩)을 아이즈센소우(会津戦争)를 정점으로 10월에는 귀순시켰다. 이듬해 5월, 최후의 거점(拠点) 하코다테고료카쿠(箱館五稜郭)를 함락(陥落)시키고, 내전(内戦)은 종결, 메이지(明治) 절대주의국가 확립으로의 길이 열렸다.

우에노센소우(上野戦争)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5월, 우에노(上野) 칸에이지(寛永寺)에서 농성하고 있던 쇼기타이(彰義隊)와 관군(官軍)의 전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가 지휘하는 관군(官軍)에 하루 만에 진압당했다.

오우에츠렛판동맹(奥羽越列藩同盟)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5월 보신센소우(戊辰戦争)에서 오우(奥羽) ・ 호쿠에츠(北越)의 제한(諸藩)이 결탁한 반정부(反政府) 군사동맹(軍事同盟).

아이즈센소우(会津戦争)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5월, 오우에츠렛판동맹(奥羽越列藩同盟)의 중심이 되었던 아이즈한(会津藩)이, 정부군(政府軍)에 저항했던 전투. 같은 해인 메이지 1년(明治 1年, 1868年) 9월에 개성(開城).

고료카쿠 전투(五稜郭の戦い)
하코다테센소우(箱館戦争).

하코다테센소우(箱館戦争)
 메이지 1년(明治 1年, 1868年), 에노모토 타케아키(榎本武揚)를 중심으로 한 큐바쿠신(旧幕臣)이 하코다테(箱館) 고료카쿠(五稜郭)에 웅거하여 신정부(新政府) 수립을 도모해, 유신정부군(維新政府軍)에 저항한 전투. 다음해, 에도모토(榎本)등은 항복, 보신센소우(戊辰戦争)는 이곳에서 종결되었다. 고료카쿠 전투(五稜郭の戦い).

메이지 1년(明治 1年, 1868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9세기 후반, 에도 바쿠후(江戸幕藩) 체제를 붕괴시켜, 중앙집권(中央集権) 통일 국가 건설과 일본(日本) 자본주의(資本主義) 형성의 기점이 된 정치적 ・ 사회적 변혁의 과정. 시기(始期) 혹은 종기(終期)를 둘러쌓고 제설(諸説)이 분분하지만, 좁은 뜻으로는 케이오 2년(慶応 2年, 1866年)의 삿쵸 연합(薩長連合)을 시작으로,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7年)의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 ・ 왕정복고(王政復古) 선언,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의 보신센소우(戊辰戦争)를 거쳐 메이지 정부(明治政府) 성립에 이른 정권교체와 그것에 기인한 정치혁명을 말한다.
메이지 2년(明治 2年, 1869年) 한세키 호칸(版籍奉還)
 메이지 2년(明治 2年, 1869年), 제한슈(諸藩主)가 영지와 인민을 조정(朝廷)에 반환한 한(藩) 해체 정책(解体政策)의 제일보. 키도 타카요시(木戸孝允) –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 – ・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의 계책에 의해, 먼저 삿쵸도히(薩長土肥) 사(四) 한슈(藩主)가 봉환하고, 타한(他藩)도 이것을 따랐다. 정부(政府)는 전국(全国)의 지배권(支配権)을 손에 넣어, 한슈(藩主)를 치한지(知藩事)에 임명(任命), 이후 하이한 치켄(廃藩置県) 등 중앙집권(中央集権)화를 추진한다.
메이지 4년(明治 4年, 1871年) 하이한 치켄(廃藩置県)
 메이지 4년(明治 4年, 1871年) 7월, 전국(全国)의 한(藩)을 폐지하고 후켄(府県)을 둔 것. 이것에 의해 중앙집권(中央集権)적 통일 국가(統一国家)가 확립되었다.
메이지 6년(明治 6年, 1873年) 세이칸론(征韓論)
 메이지 6년(明治 6年, 1873年),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 ・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 등이 조선(朝鮮)의 반일적 쇄국주의(鎖国主義)를 명목(名目)으로, 이것을 토벌할 것을 주장했던 론(論). 동년 구미(欧米) 시찰(視察)에서 돌아온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 키도 타카요시(木戸孝允) –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 – ・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은 내치우선(内治優先)을 주창해 이것을 물리쳤다. 이후 정한파(征韓派)는 하야(下野)하고, 사족 반란(士族反乱)이나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을 전개한다.
메이지 7년(明治 7年, 1874年) 사가의 란(佐賀の乱) さがのらん
 메이지 7년(明治 7年, 1874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해 하야(下野)한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 직위는 시호쿄(司法卿) – 와 시마 요시타케(島義勇) 등 불평 사족(士族)이 사가(佐賀)에서 거병(挙兵)한 사건. 이윽고 정부군(政府軍)에 패해, 에토(江藤) ・ 시마(島) 등은 효수(梟首)에 처해졌다.
메이지 9년(明治 9年, 1876年) 하기의 란(萩の乱)
 메이지 9년(明治 9年, 1876年), 야마구치현(山口県) 하기(萩)에서 일어난 사족 반란(士族反乱) – 부시(武士) 집안 -. 전 산기(参議)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등의 불만 사족(士族)은, 쿠마모토(熊本)의 신푸렌의 난(新風練の乱)에서 호응해 거병했지만 진압당했다.
메이지 10년(明治 10年, 1877年) 세이난센소우(西南戦争)
 메이지 10년(明治 10年, 1877年),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를 중심으로 하는 카고시마(鹿児島) 부시(武士) 가문의 반란. 세이칸론(征韓論)에 의해 하야한 사이고(西郷)는 낙향해서 시갓코(私学校)를 일으켰지만, 그 생도가 사이고(西郷)를 추대하여 거병, 쿠마모토(熊本) 친다이(鎮台)를 포위했지만, 정부군(政府軍)에 진압당해, 사이고(西郷)등의 지휘자는 대부분 자결했다. 메이지(明治) 초기의 부시(武士) 가문의 반란 가운데 최대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의 반정부운동(反政府運動)의 중심은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으로 이동했다.

 에도시대(江戸時代)의 말기, 유신(維新)의 시발(始発)이 된 1853년의 쿠로후네(黒船) 내항부터 메이지 정부(明治政府) 수립 후 10년이 지난 1877년까지의 격동의 역사를 용어 설명과 함께 훑어봅니다. 참고적으로 연호는 서력(西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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